전시 안내

 

최한화

안개 낀 흐린 날, 최한화 작가를 만났다.
이 : 당신과의 인터뷰를 무척 기다렸다.
최 : 감사하다.
이 : 사실 나는 문장 하나를 나노 단위로 분석하는 사람인데, 당신의 글은 단어마다 갖고 있는 뜻이 너무 많아서 다소 헤맸다. 그래서 본격적인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각 단어들의 뜻부터 정리를 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최 : 좋다.
Q1. 5년 동안 ‘내 작업은 이런 흐름을 따라왔구나’하고 스스로 정리해 본다면,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을까요?
A1. 학부시절 작성했던 초기 작업노트에서부터 지금까지 많은 것들이 첨삭되었지만 ‘모든 원리는 하나로 귀결된다.’라는 문장이 늘 작가노트의 앞머리를 장식했다. 그리고 인지-지각-도출의 단계적 개념과 불특정한 누군가의 경험을 통해 내가 내린 정의와는 또 다르게 도출될 차원에 대한 내용처럼 처음 개념에서부터 살이 붙고 시선이 옮겨지는 과정이 아직도 과정의 흐름 안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다.
이 : ‘인지-지각-도출’의 단계적 개념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나.
최 :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에게 있어 ‘인지-지각-도출’은 장치의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데, 작품이 전시장에 있을 때 관객이 들어오면 무언가 있다는 것을 시각적인 정보로 읽지 않나. 이를 통해 ‘인지’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조합의 작용점은 어떤 것일까? 이게 ‘지각’이고. 도출은 제목이나 캡션 등을 보며 힌트를 얻는 것이다.
이 : ‘재정의’라고 보아도 될까? 물론 작가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의가 있겠으나 관객이 보며 결국 또다시 바꾸어 정의하기 때문에.
최 : 작가 노트에서도 나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재정의를 한다고 썼다. 관객에 의해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해야 할까.
이 : 사실 나는 여러모로 신기했다. 나 같은 경우는 굉장히 많은 정보를 설명적으로 보여주는 스타일인데 한화 작가의 작업은 스토리가 있음에도 이를 설명으로 풀지 않아서. 어쩌면 관객에게 ‘자유를 준다’고 봐야 할까?
최 : 일단 나는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어떤 작품이라도 본래의 뼈대 이야기에 계속 포장지를 입힌다.
이 : 포장이라면 시각적인 방식의 포장인가, 혹은 설명을 덜어냄으로써의 포장인가?
최 : 둘 다 사용한다. 감정은 형태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풀어낼 수 있는 사물의 형태를 입힌다. 사물은 고장 나면 고칠 수 있는 프로세스가 있지 않나. 그런 것처럼 감정 역시도 반복되며 계속 축적되고 새로운 게 쌓이고, 다시 융합되며 또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다.
이 : 아, 그러니까 기존의 감정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감정들이 계속 중첩되고 반복되고 쌓이며 새로운 감정이 나오는 것이구나.
최 : 형태가 없으니 처리하기가 너무 힘든 것이기도 하다.
이 : 그럼 만약 감정에 형태가 생기면 고칠 수 있는 프로세스가 생길까?
최 : 그래서 사물의 형태를 빌려오는 것이다. 언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뼈대에 살을 붙인다고는 했지만 덜어내는 것에 가깝다. 최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는 공통적인 이야기 단어로 사용하려고 한다. 내 작업에는 함의적 단어가 굉장히 많은 편이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 한자어도 많고.
이 : 그래서 한화 작가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걱정이 앞섰나 보다.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단어들의 뜻이 너무 헷갈렸다. 상반된 말인지 일치된 말인지 해석해야 하는데 뜻이 굉장히 많은 단어들이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짚는 게 까다로웠다.
최 : 대화를 나누면 조금 쉬울 거다.
이 : 이번 전시에서 발표하는 신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세 작품이 전부 하나의 시리즈다.
최 : 맞다.
이 : 〈Volume〉, 〈Respect〉, 〈Jazzing〉 순서다.
최 : 〈Volume〉은 인지를 다루는 작품이다. 예를 들어 눈앞의 컵을 볼 때도 컵 안의 빈 공간과 밖을 에워싸는 빈 공간을 통해 대상을 인지하게 되지 않나. 그러면 내가 이 대상을 본다고 할 수 있나? 어쩌면 공간을 보는 걸 수도 있지 않은가. 이러한 개념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컵을 정의 내릴 수 있는가. 컵을 인지할 수 있을까? 컵은 커피나 물을 마시면 컵이 되지만 화분으로 사용하면 화분으로도 쓰일 수 있다.
이 : 나는 비어 있다는 개념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투명 유리 상자는 눈으로 볼 때만 비어 있을 수 있다. 현미경으로 본다면? 과연 그때도 비어있을까? 확대해 보면 유리상자 속은 엄청나게 채워져 있을 것이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공간을 채우는 연기의 흐름은 시시각각 바뀌지만 이 역시도 채워져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궁금증이 컸다. 컵과 화분은 용도에 대한 쓰임 차이이지만 작가 노트를 보면 모양에 따른 차이로도 보인다. 컵이 아니라 통으로도 볼 수 있듯이.
최 : 결국 경험으로 인한 주관적인 해석의 영역이다. 사물보다 사람으로 빗대어 보면 더 쉬울 수도 있다. 내가 미현을 볼 때 나는 미현을 내 멋대로 해석할 것이다. 미현 고유의 정의가 있지만 내 정의에서는 미현의 정의를 다시 재해석해버린다. 나의 미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 순수한 타인의 본질보다는 순전히 데이터로 쌓여온 자신의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인가.
최 : 그렇다면 그건 미현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나의 미현일까?
이 : 이해된다.
최 : 이런 느낌이다.
이 : 이해가 계속 안 됐던 이유를 돌이켜보았는데 결국 사람과 사물의 본질 차이 같다. 사물로 빗대어 보려고 해도 결국 사람의 이야기이므로 여기서 간극이 벌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Respect〉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순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 사물은 굉장히 일상적인 요소다. 특수하게 제작하거나 상상하는 것보단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흔하게 볼 수 있는 요소를 전시장으로 가져오는 과정이 궁금하다. 평소 내면을 어떻게 표현해 볼까 고민하는 게 앞서는지, 혹은 사물을 바라보다 우연적으로 맞아떨어져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지 묻고 싶다.
최 : 사물을 보고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먼저 개념적인 걸 작성하고 내가 쓴 글에서 힌트를 많이 얻는다.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글이 첫 번째이기 때문에.
이 : 사물은 모양이 비슷한 경우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책과 노트북처럼. 두 사물은 모양이 굉장히 비슷하지만 특성은 몹시 다르다. 근데 그중에서도 딱 하나의 사물로 선정하게 되는 이유가 궁금하다. 형태적 유사성을 가진 사물들 사이에서 꼭 이 사물이어야 된다고 포착하게 되는 계기가 있나.
최 : 근데 사실 다른 시기에 똑같은 작업이 나왔다면 다른 사물을 썼을 수도 있다. 작품을 제작하는 당시에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느끼면 선정한다.
이 : 그러면 그 시기에만 나오는 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최 : 그렇다.
이 : 그 시기를 넘어가면 다른 형태로 바뀌어버릴 수도 있을까?
최 : 그래서 이전 작업들을 떠올렸을 때 ‘이렇게 하면 더 효과적이었을 텐데’라고 생각해서 재작업에 들어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 : 몰랐다. 혹시 재작업했던 작업들 몇 개만 소개해줄 수 있나.
ⓒ최한화.
최 : 이 작업 같은 경우에도 원래 실제 장갑을 사용하지 않고 바느질해서 장갑을 만들었다. 그때도 이런 형태의 잇몸과 치아가 박혀있었지만 다시 더 잇몸스럽고 치아스럽게 만들고 싶어서 재작업을 했다.
이 : 나는 한화 작가의 작업을 무척 좋아해서 작품이 완성되면 절대 바꾸지 않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계속 디벨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한정판 같고 좋다.
Q2. 2021년, 작업이나 사고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사건이나 감정이 있다면?
A2. 2021년 제주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더 날것의 형태인 불안과 부정이 기반이었던 시기인 것 같다. 그래도 조금 더 현명하게 그것들을 다스리려 작품으로 녹여냈던 것 같다.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꼭 나만의 이야기가 될 수 없는, 그 누구도 나의 이야기인지 알 수 없게끔 포장에 포장을 더하며 차가운 사물 뒤편에 꽁꽁 숨겨 누구나에게 전달되기만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한 감정들이 관람객에게 닿고 공감을 얻으면 스스로에게 확신이 생겼다. 21년도 작가노트에서도 ‘모든 원리는 하나로 귀결된다.’라는 글로 시작되는데, 이 큰 맥락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때의 작품들은 아직도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곤 한다.
이 : ‘모든 원리는 하나로 귀결된다’. 이때의 ‘하나’가 너무 궁금하다. 어떤 귀결인가?
최 : 세상을 바라볼 때 닮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유머를 좋아해서 반복적으로 닮아있는 것들을 찾는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에 닮아 있는 게 너무 많더라. 그래서 어쩌면 이 세상은 하나로 귀결될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이 났다. 레디메이드를 하기 전에는 인체와 자연의 닮은 부분을 찾는 페인팅 작업을 했다.
이 : 그때 작업을 좀 볼 수 있을까.
최 : 물론이다.
ⓒ최한화.
이 : 근데 한화 작가의 글에서 ‘유머’라는 단어를 본 적이 없는데. ‘유머’라는 단어가 언급되어 궁금증이 든다.
최 : 다들 작가 노트를 보면 내 작업에서 유머를 느낀 적이 없다고 한다. 나만 재밌나?
이 : 어떤 유머를 말하는 건가.
최 : 나는 내 작업들이 다 재밌다.
이 : 그 유머가 내가 아는 유머가 맞나? 사전적 정의를 좀 검색해 봐야겠다.
최 : 그러니까 약간 말장난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선배 작가한테 재밌지 않냐고 물었더니 되게 당황하더라. 유머가 아니라 재치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 선배분의 말씀이 약간 이해가 된다.
최 : 제작자로서의 재미일 수도 있다. 이런 경험, 저런 경험을 다 하나로 모아서 ‘어떻게 하나의 획을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다가 또 ‘이런 획을 어떤 사물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할 때. 이게 맞닥뜨려지면 나는 그게 너무 재밌다.
이 : 작가의 말을 들으면서 ‘재미’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결국엔 모사도 재미의 요소가 쓰이는 경우가 많으니까. 누군가를 따라 하기만 해도 사람들은 웃는다. 근데 사실 유사성 빼곤 뭐가 없거든.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지 않아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웃기지 않나. 그런 것처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을 것 같던 것들이 이어지면 이어짐을 찾는 작가에게는 재밌을 수 있을 것 같다.
최 : 거기다 또 캡션까지. 작품 제목까지 딱 맞을 때 재밌는 거다.
이 : 삼 박자가 맞아떨어질 때.
이 : 이것도 여쭤보고 싶었다. 스스로 확신하지 못한 감정들이 관람객에게 닿고 공감을 얻으면 스스로에게 확신이 생긴다는 말이 어떤 스토리텔링을 가졌는지.
최 : 20대 초, 나에 대한 고민이 엄청 많을 때. 나는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이게 맞는 말인지 아닌지 너무 헷갈려서. 그러다 동료들이 술자리에서 나랑 조금 비슷한 말을 하면 그때 이후에야 내 말을 할 수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고 늘 방어적이었으니까. 그래서 작품 역시도 랩핑을 많이 해서 선보였다. 공감해 보라는 느낌이랄까.
이 : 어떤 작업이었는지 전부 떠오른다. 나 같이 감명을 많이 받은 관객들은 작품을 보고 많이들 언어로, 행동으로 표현했을 것 같은데, 그런 말들이 작가에게 닿으면 또 다른 확신으로 다가오나?
최 : 그렇다기보단 만들면서 정의가 되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쓴 글을 매우 자주 보거든. 큰 위로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미현처럼 느낀 바를 말해주는 관객을 만나면 많이 놀란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싶기도 하면서. 또 다른 의견이니까.
ⓒ최한화.
Q3. 2025년, 이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업이 지난 4년과 가장 크게 다른 지점은 무엇인가요?
A3. 2025년 제주
과거의 작업 방식처럼 사물의 형태를 빌려 사용되지만, 스스로를 향했던 눈이 타인을 향하게 되었다. 물론 이번 작업 또한 스스로가 합리화시킨 정의들이긴 하나 그 정의가 오로지 나에게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전 작업들은 관람객에게 공감을 갈구하며, 스스로를 확신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면 이번 작업은 굳이 공감을 갈구하지 않아도 홀로 서있을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
이 : 최근을 기점으로 작업이 내면에서 외부로, 관계로 빠졌지 않나. 혹시 어떤 계기가 따로 있었나?
최 : 23년도에 개인전을 하고 난 뒤 1년 동안 작업을 하지 않았다. 매우 오랜만에 새로운 작업을 하는 게 이번 전시였다.
이 : 영광이다.
최 : 당시 전시들이 급박하게 이루어진 전시들이었어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다 쏟아냈다. 나는 보통 부정을 기반으로 작업을 했는데, 부정적인 걸 다 쏟아내니까 ‘앞으로 행복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들더라.
이 : 부정이라는 게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을 말하는 건가, 아니면 자기부정을 뜻하는 것인가?
최 : 여러 가지를 다 포함하는 부정이다. 부정을 사용하다 보니 더 이상 불행하지 않았다.
이 : 어쩌면 좋은 것일 수도 있겠다.
최 : 좋지. 근데 앞으로 부정을 가지고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작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그러다 더 이상 감정을 소비하는 건 안 되겠다고 판단이 섰고. 지금까지 난 나에게 너무 집중해 왔는데 - 물론 나에 대해 아직 알아가야 할 부분은 많지만 - 이제 세상과 나를 결합시켜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최 : 그러던 와중에 24년도에 4.3 미술제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전시해 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시선을 바꿀 좋은 계기가 될 것 같았다. 물론 공부를 시작하고 작품으로 뭔가를 표현해 내는 과정은 정말 힘들었다.
이 : 나는 그 과정을 모르다 보니 4.3 미술제도 하나의 전시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공부를 한다고 하니 일반 전시와 다르다고 생각이 드는데. 과정에 대해서 말해주면 좋을 것 같다.
최 : 청년들을 모아서 도내 유적지를 계속 돌며 지역의 국가적 폭압에 대해 배우고 저항하는 사람들 - 함께 하는 청년들과 소통하고 설명을 듣는 프로그램을 가졌다. 또한 4.3에 대해 다루는 선배 작가님들도 만나 강의도 들었다. 4.3 사건은 물리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내가 이걸 마치 경험했다는 듯이 작업할 수가 없는 사건이다. 4.3 사건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연륜이 쌓이신 분들도 계셨지만 사상으로 나만의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다. 그 1년이라는 시간이 짧다면 짧지만 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거치며 더 확신이 생겼다.
최 : 내가 아직 가야 할 길이 너무 넓다고 느껴졌다. 이때 마치 처음 작업하는 것처럼 시야가 확 바뀌었다. 작업 주제에 대한 고민이 있던 차에 그런 상황을 겪으니 조금 더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달까. 나를 향하던 방향이 밖으로 나가는 첫 번째 대상이었다. 돌다리의 첫 돌 같은 개념이다.
이 : ‘나’에게서 벗어난 첫 돌이 결국은 ‘대상’인 건가. 대상은 어떤 일의 상대라는 의미 아닌가. 그럼 대상의 사전적 정의를 넘어 결국 ‘너’를 의미한다고 보아도 될까?
최 : 여지를 상대에게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가장 고려한 요소는 상호작용에서 실재하게 되는 것이다. 내 견해로 해석한 미현이 진짜 미현인지. 아까 이야기했듯이 나는 온전히 대상을 바라본다고 말을 못 하겠다. 대상은 온전한 존재로 있기 때문에. 도구적 결합이라고 얘기하면 될까?
이 : 사람은 아무리 가까워도 자기 자신만큼 가까워질 수는 없다. 그건 사람을 넘어 생명이라면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이 가장 가까운 1인칭이다. 본인이 본인을 가장 잘 아는 것이 결국 본인의 역할인 셈이다.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역할. 그렇다면 타인이 해석하는 것은 역할과 역할의 만남이라고 보면 될까? 타인을 해석하는 것은 부여받은 역할은 아니지만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이 역시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최 : 그렇다.
이 : 〈Respect〉에 대한 설명을 좀 더 해달라.
최 : 〈Respect〉는 박스에 머리카락이 감싸져 있다. 아래는 뚫려 있고. 그 속에 머리를 집어넣을 수 있다. 머리를 넣으면 사방이 거울이다. 스스로에게 가려 타인을 보지 못하는 것을 표현했다. 내 견해로 해석된 너를 바라보는, 결국 너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나의 너를 바라보는 스스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을.
이 : 〈Volume〉보다 막이 더 강해졌다.
최 : 결코 너를 바라볼 수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너 역시 나를 결코 바라볼 수 없기도 하다.
이 : 밖에서 안에 있는 사람을 보아도 가려져 있구나.
최 : 계속 대상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반대도 될 수 있다.
이 : 〈Respect〉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는?
최 : 존중하겠다는 거지. 내 견해로 널 바라보지만 존중하겠다는 의미다.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이 : 취향 존중. 나는 단순히 〈Respect〉에 대한 작가노트를 보고 대상의 형태를 해체시켜 본질적인 대상을 쫓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반대다.
최 : 인정하고 바라보는 느낌이다. 1인만 들어갈 수 있는 크기고, 구조 역시 자기 자신만 들어갈 수 있다.
이 : 〈Jazzing〉에 대해서도 말해달라. 사실 전시 기획 초반에는 제목이 없고 〈미정〉이라고만 되어 있어 베일에 싸여있었다. 제일 궁금한 작품이기도 했다.
최 : 〈Volume〉과 〈Respect〉의 결괏값이라고 보면 된다. 상호작용의 표본인 셈이다. 〈Jazzing〉은 척추가 실로폰을 때리는 작품인데 사물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앞서 계속 말했던 예시가 사물이었던 것도, 인간일 수도 있지만 사물도 될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여지를 확장시키고자 말했던 것이다.
최 : 악기를 연주할 때 사람은 손과 발로 연주를 하지 않나. 근데 내 눈엔 그건 손으로 연주하는 게 아니라 배꼽으로 연주하는 느낌이다. 피아노는 꼬리뼈로 연주하는 느낌을 받았고.
이 : 악기 그 자체와 맞닿는 부분이다.
최 : 움직이는 건 활과 손가락이지만 힘의 중심은 그곳에서 나온다.
이 : 힘이 출발하는 곳.
최 : 그래서 연주를 볼 때도 그 사람의 배꼽과 꼬리뼈만 봤다. 서로 바라볼 수는 없지만 계속 작용은 되고 있는 부분. 인간과 인간으로 대입했을 때도 비슷한 맥락을 읽었다. 상호작용이 일어났을 때 해석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는 온전한 정의와 온전한 정의. 활과 손은 확실히 연결 구조지만 배꼽과 꼬리뼈는 분리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근데 ‘연주’라는 행위를 보면 그게 좀 섞이는 느낌이 들어서. 이를테면 악기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악기가 되는 느낌이랄까? 내가 대상을 바라볼 때도 작용 과정에서 너의 정의와 나의 정의가 섞인다고 생각했다.
이 : 대화를 하며 사물에 대해 생각해 보면 사람은 사물을 봤을 때 유사성을 찾는데, 한화 작가의 작업은 그 유사성을 작가의 해석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말하는 바가 사람 간의 이야기여도 사물로써 투영시킬 수 있는 구조라고 읽히고.
최 : 주체가 중요하다. 내가 연주자라면 타인은 악기고, 타인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연주자일 것이므로 내가 악기가 되는 것이다.
이 : 마지막으로 전시를 앞두고 있는 요즘의 근황으로 마무리를 지으면 좋을 것 같다.
최 : 요즘 몹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래도 작업을 간만에 즐겁게 하는 요즘이다. 너무 바빠서 예민한 상태였는데 작업을 시작한 첫날 상태가 확 좋아진 게 느껴졌다. 주변에서 ‘너는 미술을 해야 하는 운명이다’라고 할 정도로. 작품에 쓸 척추를 구입하면 되는데 구입하기 싫었다. 하나하나 만들어 가는 과정 속에서, 엄지가 흙을 만질 때 뼈도 인체와 너무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생각도 굉장히 오랜만이라 행복하게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다.
 
최한화 작가의 작업은 철학적이다. 개인의 철학은 그간 작가가 많은 고민을 해온 흔적이기도 하다.
대화가 끝나면 미처 보지 못한 사고의 뒷면이 순식간에 열린다. 관계를 볼 때 우리는 대개 타인과의 관계를 떠올리지만 가장 가깝고 오래 보았던 관계는 자기 자신이다. 당연하기에 익숙해져 버린 것들을 작가는 특유의 시각으로 다시금 관객에게 자연스레 내민다. 우리는 그녀의 작업을 본 뒤 무심코 연주자의 배꼽을, 꼬리뼈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무심코 넘겨버린 책의 앞장을 뒷장을 다 읽고 난 뒤 다시금 후다닥 넘겨보는 것처럼 그녀의 작업을 보고 나면 묵직하게 들어오는 인상으로 인해 개념의 첫 단추부터 돌이켜보게 된다. 작가가 재정의한 함의와 나의 정의를 맞대보며 그 교집합을 면밀히 살피게 된다. 매일 같이 보았던 사물과 개념을 작가의 시각으로 관찰하게 된다. 전시장을 넘어 개인을, 사회를 그녀의 시각을 빌려보는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한 번도 뒤집지 않았던 사물의 뒷면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온전한 대상을 헤아리지 못하더라도 관계 속에서 실재하는 것들에 주목하며, 그렇게.
* 2025. 05. 30 제주 최한화 작가와의 인터뷰

Volume

2025, MDF, 스티로폼, FRP, 가변설치. ⓒ최한화.

어떤 대상을 인지함이란 시선의 끝이 물리적으로 부딪혀 떨어지는 곳에서 시작된다. 대상은 공간을 밀어내며 부피와 밀도를 형성하는데 그 공간감을 통해 대상의 형태를 인지하게 된다. 고로 대상의 실체 자체를 인지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에서 대상 외의 것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을 온전히 대상을 인지한다고 볼 수 있는가?

Respect

2025, MDF, 거울, 인모, 가변크기. ⓒ최한화.

대상은 본질을 잃고 온전히 나의 것으로 해체된다.

Jazzing

2025, 클레이, 펠트, 현, 가변크기. ⓒ최한화.

두 개의 현상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일시적으로 '관계적 실재' 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