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경
이 : 사전 인터뷰를 읽는데 이렇게 재밌는 글은 오랜만이었다. 당신의 글 속엔 미술이 참 많다. 미술에 대한 언급이 이렇게 많은 글은 처음이라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처음 읽을 땐 전시 인터뷰여서 이렇게 많이 언급하나 싶었는데, 끝까지 다 읽고 나니 ‘고희경’이라는 사람 자체가 미술을 없애면 표현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동의하나?
고 : 그림을 빼면 내가 아니긴 하지. 그림은 나의 감정을 표출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일단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들어 있다. 하고 싶은데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포기하게 됐던 순간도 여럿 있었는데,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아등바등 본업과 함께 이끌고 나갔던 게 미술이어서. 어쩌면 작업을 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닐까 싶다. 작업을 하면 행복함과 동시에 너무 힘들어서 악순환이다. 그러나 결코 놓을 수는 없는 거지. 그런 관계다.
Q1. 2024년, 작업과 삶은 어떤 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나요?
A1. 24년, 나는 다시 내 세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끝맺음을 해야 했기 때문에. 이때의 나는 내 일상이 없었다. 기분이라는 것은 나를 괴롭히는 하나의 도구였으며, 몸이 좋지 않은 것은 못된 핑계라 생각하며 나 자신을 혹사시켰다. 땀이 나는 여름, 열선 앞에 서 있었고 에어컨 없는 야외에서의 작업이 이어졌다. 이 당시 나에게는 작업이 전부였으며 일상과 분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나의 일상은 작업의 연속이었고, 작업은 나의 일상에 불과했다.
이 : 미술을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작업은 체력적인 부담이 따른다. 일상을 미술로만 채운다는 것 역시도 양가적인 감정이 안 들 수가 없을 것이고. 아마도 ‘끝맺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졸업 전시 때인 것 같은데, 2024년과 2025년의 연장선은 어떻게 흘렀나.
고 : 사실 2024년은 작업 말고도 여러 가지 전시 운영과 관련된 일을 병행했기 때문에.
이 : 아, 혹시 졸준위?
고 : SNS 관리까지 내가 했다.
이 : 힘들었겠는데.
고 : 그땐 작업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여러모로 너무 바빴다. 근데 지금은 솔직히 작년보다 더 많이 전시가 잡혔는데도 여유가 생겼다. 작업과 나를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달까. 예전에는 평소에 ‘계속 작업만 해야 한다’는 심리가 있었다. ‘빨리 끝내고 이만큼 쉬어야지’라고 조절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다.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다는 욕구와 더 잘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져서 일상과의 분리가 없었다. 근데 지금은 어느 정도 작품과 타협을 할 수 있는 경계점을 찾아서 쉴 수 있다. 무조건 끝낼 걸 아니까.
이 : 자신감이 붙었구나. 건강해진 것 같아 보기 좋다.
고 : ‘이만큼 시간이 남은 거면 무조건 기한 내로 완성할 수 있다’는 데이터가 쌓이다 보니 많이 좋아졌다. 옛날엔 작업하면서 스트레스를 너무 받고 작업하면서 운 적도 많았거든. 잠도 3시간 정도밖에 못 자고 그랬다. 지금은 즐기며 작업하고 있다.
Q2. 2021년, 작업이나 사고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사건이나 감정이 있다면?
A2. 21년, 부모님이 나한테 집 리모델링을 맡겼다. 어른이 된 나이이지만 누군가, 아니 많은 이들에게 어리다고 무시받던 나이였다. 내가 원하던 방향과 모든 일들이 처리되지 않았고, 문제의 탓은 업자들이 아닌 오롯이 나에게만 오게 되었다. 이때 나는 혼자 살아가야 하는 방법과 나의 주체성을 가지는 법, 목소리를 내는 법, 색을 가지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이후로 나의 작업에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주제를 찾으려고 애쓰기 시작했던 시점이다.
Q3. 과거와 지금을 비교해 보았을 때, 지금의 '상'과 과거의 '상'은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A3. 과거, 아주 아무렇지 않고 어렸을 시점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지만, 근 몇 년간 성인이 되고 난 이후로의 나는 거의 동일시하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럼으로 나는 같은 단어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형상을 바라보지 않지만 그 형상을 찾고 만들어 내며 그 형상에 대해서 탐구한다 말하고 싶다.
이 : 당신은 당신의 상이 ‘형상’이라고 말하였지만 글쎄, 나는 형상을 넘은 무언가가 있어 보인다. 비유하자면 폭풍 속의 등대지기 같은 거지. 외부적 요인으로 내면에 계속 파동이 이는 것 같은데 그림으로 계속 발산해 내고 이를 타자화하여 바라보는 구조라 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꼭 당신이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확실한 건 당신의 형상은 그저 ‘모양’으로 단순화시킬 수 없다.
고 : 모양은 절대 아니다. 형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외부적으로 보이는 모양이나 부분이라 그랬던 거다. 나는 상상하지 않는다. 내용은 담지만 그 모든 것은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쓰는 형상들은 모양이 이상하거나 어딘가가 뒤틀려 있거나 색깔이 고유한 색과 다르다. 이런 것들을 보면 내가 추구하는 불안정과 안정, 그 사이 어딘가쯤으로 여겨진다.
고 : 스물한 살 때를 돌이켜보면 나는 객관화가 잘 된 편이었다. 철이 빨리 들었다고나 할까. 누군가를 만날 때나, 무언가를 할 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알았다. 매뉴얼 같은 게 생겨버려서 그때와 지금의 나는 거의 동일한 사고방식인 셈이다.
이 : ‘매뉴얼’이라는 말이 특이하다. 사고방식의 기준을 물어보았을 때 매뉴얼이라고 답한 사람은 희경 작가가 유일하다. 작가의 매뉴얼을 좀 더 파고들어 보면 그 매뉴얼은 결국 타인을 대하는 매뉴얼인가. 작가 자신과 분리된? 이를테면 혈액형처럼 일체화되어 있는 요소 중 하나인 건지 타인의 타입을 분석하여 매뉴얼을 적용시키는지 궁금하다.
고 : 사실 둘 다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비슷하게 표현하지만 특정 타입의 사람들에게는 또 맞춰주기도 하고.
Q4. '존재'의 개념에서 가벼움을 느끼게 된 계기가 있나요? 만약 실존하는 어떤 존재를 통해 그 가벼움을 인식하셨다면 그 존재는 타자였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반대로 실존이 아닌 개념적 접근을 통해 가벼움의 감각을 느끼셨다면, 어떤 사유의 과정을 통해 ‘존재의 가벼움’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도 듣고 싶습니다.
- knock! knock! Who’s there? 중 '존재함은 가히 가벼운 것이다'에 관하여.
A4.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가끔 갑작스레 떠나곤 한다. 내가 받아들이기도 힘들게 말이다. 누군가에게 탓을 할 수도 없고 그들의 말을 들어볼 수도 없다. 또 나 자신을 돌아본다 하면? 난 잘못한 게 없다. 그저 나는 누군가를 자주 지치게 하며, 떠나보내는 사람인가 보다. 이를 통해 나는 인간관계에 대한 가벼움을 느꼈다. 이뿐 아니라, 요즘 세상에 대한 풍자로 이어지기도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싫어하기에 바쁜 요즘 사회에 대한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맞다. 나 자신도 사랑하기 힘든 세상에 사람들은 모두를 미워하고 탓하기 바쁘다. 이런 모습들을 보며, 나는 그 모두가 삶의 무게가 없다 느꼈으며 이를 통해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생각했다.
이 : 당신의 글을 읽으며 좀 울컥했던 파트다. 이별의 무게에 관해 말해보고 싶다. 이때의 이별은 이성관계의 이별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이별이다. 이별은 싸우거나 안 맞아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상황으로 인해 어쩌다 보니 하게 될 때도 있다. 근데 난 ‘그저 나는 누군가를 자주 지치게 하며, 떠나보내는 사람인가 보다.’ 이 부분이 자꾸만 걸렸다.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서. 난 당신이 자존감이 높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이 떠나보냈기 때문에 이런 자평을 하게 된 것인가?
고 : 지금의 나는 그전의 내가 해온 것에 대한 축적이다. 떠나보낸 사람들이 너무 쌓이다 보니 누군가를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가 생긴 셈이다. 떠나간 사람들이 고정적으로 했던 말이 있었다.
이 : 무엇인가.
고 :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이 : 어떤 부분에서 그러면 안 된다는 건가?
고 : 누군가를 좀 많이 지치게 했나보다. 지금은 자존감이 엄청 높은 편인데 옛날엔 진짜 낮았다. 그래서 되게 집착하거나 예민하게 굴 때도 있었다. 막말을 일삼았을 때도 있었고. 가족들한테도 그렇고 완전 친한 친구들한테도 나도 모르게 툭툭 튀어나오는데 이런 것들이 누군가를 상처준 적이 진짜 많았다. 결국 나중에는 떠나더라고. 나의 모든 부분을 받아줄 수는 없으니. 옛날에는 그런 게 정말 슬펐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누군가가 떠나면 또 다른 누군가가 오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
이 : 무뎌졌구나. 당신은 스물한 살과 비슷한 궤를 가졌다고 얘기하지만 어른이 되어간다.
Q5. ‘불안정’ 시리즈를 관통하는 개념은 역설적이게도 ‘안정’처럼 보입니다. 작가님께 ‘안정’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또한 시리즈를 관통하는 다른 개념이 있다면 함께 들려주세요.
- 불안정 시리즈에 관하여.
A5. 시리즈를 작업하며 나 자신은 일그러지고, 부서지며 제일 ‘사람 같지 않았던 죽어있던 시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 자신을 사랑하지도,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않은 감정이라는 것이 결여된 시점. 나는 이 작업 속에서 모순되지만 항상 안정을 찾고 말했다. 형태가 불안정하다면 색에 대한 안정을 가지고 가거나, 형태가 완전하다면 색에 대한 결여를 가지고 가며 이 정체성을 계속해서 부여하고 이어나갔다. 의도 하에 내가 설정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작업에 대한 구상을 하며 그렇게 이어나가게 됐다. 그 또한 내가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 내 시리즈의 역설적인 부분일 것이다. 이 시리즈를 작업하며 증오하던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던 것으로 보아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는 개념도 함께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 난 이게 너무 재밌다. 형태가 불안정하면 색에 대한 안정을, 형태가 완전하면 색에 대한 결여를 쫓는다니. 이게 의도하지 않고 나올 수 있나 싶었다. 의도하지 않았다면 결국 무의식이란 말이니까. 그럼 무의식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뒤늦게 발견한 건가.
고 : 그렇다기보단 너무 디테일한 것들에 형태를 없애버리면 퀄리티가 마음에 안 들게 나온다. 진짜 많이 만들어 봤는데 형태가 완벽한 작업은 색이 튀었고 색이 차분한 애들은 형태를 뭉그러뜨리게 되더라.
이 : 고유한 취향이 남긴 밸런스일까.
고 : 그렇다.
이 : 무의식의 표출인 줄 알았는데 퀄리티의 레벨을 무의식이 계속 느끼고 있는 거였다.
Q6. 2023년, 전환의 시기 or 일상의 연장?
A6. 23년, 나는 다시 미술을 포기했다. 나는 그 당시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어 열심히 나의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나누어주는 역할이었다. 어느 순간 이 일은 나와 맞지 않고, 아무 쓸데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술을 놓아버리는 것은 나에겐 너무 힘든 상황까지 직면했기 때문이었다. 모순적이게도 나는 그러한 고문 속에서 다시 희망을 찾았다. 나는 누군가는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될 수 있으며, 소비될 수 있는 하나의 소재임을 그때 다시 알았다. 이때 또 한 번 다시 미술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이 굴레 속으로 들어왔다.
이 : 줄기차게 미술만을 외쳐왔는데 갑자기 미술을 포기했다니. 어쩐지 나 역시도 욱신거리는 감정이 들었다. 희경 작가는 외부적 요인에 심리적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인데. 이 역시도 결국 외부적 요인에 기인한 선택이었나?
고 : 2023년에는 A 화실에서 미술 강사로 근무하던 때다. 동기와 함께 다녔는데 매일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
이 : 이를테면 어떤 의미의 안 좋은 일?
고 : 학생들이 ‘시급 얼마 받냐’고 묻는 건 기본이고, ‘얼마 드릴 테니까 제 거 대신 그려주세요.’하는 학생도 있었다. 본인이 돈이 많다는 것을 알아서 기본적으로 하대하는 게 있었다. 당시엔 지금보다 더 튀는 스타일링을 하고 다녔는데 동기한테 나처럼 튀는 스타일링을 하라고 지적하는 모습도 종종 보았다.
이 : 개인의 스타일링까지 지적하는 건 진짜 이상하다.
고 : 일하면서 스트레스가 정말 컸다. 10시간 근무하는데 10분 남짓밖에 쉴 수 없었다. 남의 그림을 10시간씩 그리고 집에 오니 내 그림까지 그릴 여력이 없었다. 남의 그림만 그려주고, 스케치 떠주는 기계처럼 살았다.
고 : 고학년 학생들한테는 맞는 화풍도 찾아줘야 했다. 내 스타일도 정확하게 찾지 못했는데 그들의 스타일을, 화풍을, 기법을 정해주다 보니 정작 내 것은 놓아버린 거지. 주에 3-4일 밖에 일을 안 했는데 다른 날은 놀지도 못했다. 너무 힘들어서.
이 : 진짜 힘들었을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중학생까지 10시간 동안 봐주다 보면 기가 안 빨리는 게 이상하다.
고 : 함께 들어간 동기도 관두고 나밖에 안 남으니 정신적으로 극에 달해버렸나. 어느 날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다. 당연히 출근도 못했고 눈 떠보니 중환자실이었다. 핸드폰이 있을 리 없지. 중환자실인데.
이 : 세상에.
고 : 중환자실은 당장 나갈 수도 없다. 잠깐 나가는 타임까지 겨우 기다려서야 중환자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다음날 출근했는데 사장님이 부르더라. 이런 식으로 일하면 안 된다고.
이 : 미친 것 같다. 중환자실에서 방금 나온 사람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나.
고 : 심지어 다른 강사와 비교도 당했다. 왜 개인작업이 멈춰 있냐고. 근데 웃긴 건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어떤 작업을 하는지 본 적도 없는 사람이 그랬다는 점이다.
이 :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을 수가 있나.
고 : 그럼에도 그림 그리는 건 재밌으니까. 그리고 난 내가 소비가 되는 타입이라는 걸 알았다. 일 하면서 종종 외부적인 요인 덕분에 스타성이 있다는 말도 꽤 들었어서. SNS를 본격적으로 운영해 보라는 말도 들었다. 근데 난 남의 것은 키워줄 수 있어도 내 건 쉽게 키우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 잠깐만. 그럼 그 희망이 어린아이를 보고 생겨난 희망 같은 게 아니라 본인의 스타성으로 인해 가능성을 보고 생겨난 희망인가?
고 : 그것도 있고 후반으로 가면서 스타일을 점차 찾아나갔기 때문도 있다.
Q7. 작업의 방식(매체, 형식 등)에도 연도별로 분명한 변화가 있었나요?
A7. 2020~2023 평면 → 2022 구상화에서 반추상으로 넘어간다. → 2023 해체되고, 재구성하는 평면에 눈을 뜬다. 작업의 결도 이때 많이 달라졌다. 추상화, 텍스쳐가 있는 작업들을 하기 시작했다. → 2024 설치미술, 조형미술을 하기 시작했다. → 2025 그 모든 작업 방식을 받아들이고 전부 하기 시작했다.
이 : 창작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작가가 아니라서 장르를 바꾸는 것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하지만 희경 작가는 그런 게 아니라고 판단이 든다. 심경의 변화와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애초에 당신에게 미술은 분출의 도구이자 또 다른 자기 자신이니까. 자기 자신을 바꾸는 행위와도 비슷했을 것 같다.
고 : 맞는 것 같다. 나에겐 아직도 평면이 1순위인데 설치나 해체 등 다른 것들을 계속 시도하는 건 나에 대한 확장성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면으로만 나를 표현할 수 없을 때 조각이나 설치 같은 것들을 한 번씩 해보는 것 같다. 이것 역시도 나 자신이니까. 작업 방식을 바꿨다기보다는 추가했다에 가깝지.
이 : 스펙트럼을 넓힌 건가. 당신의 글을 읽으면 ‘안정’에 대한 언급이 잦다. 이때의 안정은 어떤 함의를 지녔나. 타인이나 외부적 요인에서 비롯되는 불안정이 없는 상태인가, 혹은 내면화되는 과정에서 파동이 일어도 안정감이 유지된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아예 또 다른 이상향인 건지 묻고 싶다.
고 : 전부 포함된다. 난 뭔가 하나만 생각하는 타입이 아니거든. 그래서 모든 글을 쓸 때면 항상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을 한다. 누군가 간섭하지 않을 때 안정감을 느끼지만 솔직히 말은 안 되는 거니까. 오히려 매우 안정됐다고 느낄 때면 다시 이슈를 만들기도 한다.
이 : 불안정이 곧 자극제 역할이기도 한가 보다.
고 : 나도 모르게 굴레 속으로 들어간다. 겨우 괜찮아졌는데도 다른 이슈를 만들거나 처음 해보는 재료를 쓰며 다시금 힘든 상황을 연출한다. 그럼 너무 힘이 들지. 근데 또 재미가 있다. 이러한 힘듦을 극복하면 다시금 안정이 찾아오는 느낌이 든다. 결국 안정은 이상향인 것 같다. 궁극적으로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상향.
이 : 이데아구나. 사전 인터뷰에서 작가가 안정은 이상향이고 불안정은 친구라고 썼는데 이 말에 공감을 못했었다. 근데 인터뷰 전반을 들으며 불안정이 더 가까워 보인다. 안정은 언제나 목표치인 것만 같고.
고 : 요즘은 예전보다 불안정함을 느끼는 기준이 높아졌다. 예전만큼 똑같이 불안정한 상황이 와도 옛날보다 데미지가 적다.
이 : 당신의 이번 작업은 결국 베타를 빼면 말할 수 없다. 근데 인터뷰를 준비하며 좀 찾아봤는데 베타, 희경 작가를 닮았다.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생물이고 예민한 기질을 가진 데다 물속을 떠다니는 것에 노력을 기울인다는 게 특히 그렇다. 물고기인데 물속을 떠다니는데 노력을 기울인다니. 우리가 숨을 쉬는 것과 같은 맥락 같은데. 이러한 부분이 당신이 불안정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고 : 그래서 베타를 선택한 거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외관에 끌려 그려본 것인데 계속 찾아볼수록 나와 너무 닮은 거다. 예민한 기질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도.
이 : 마지막으로 전시를 보러 올 관객들에게 시리즈와 작품 전반에 대해 강조점을 말해주면 좋을 것 같다.
고 : 내 작품은 하나 같이 다 나사 하나 풀려 있는 느낌이다. 조금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게 모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표현하는 도구이지만 어딘가 나사가 빠져있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그러나 그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있다. 이런 나를 아무렇지 않게 봐줬으면 좋겠다. 어쩌면 조금 이상할지라도 마냥 자연스럽게. 불안정한 형상이라도 이것 자체가 완성이니까.
고희경 작가의 집은 스물한 살 때 그녀가 계획하고 지었다.
벽 하나를 다 집어삼킬 만큼 커다란 화폭의 그림은 집 전체를 가득 메운다. 일그러진 형상과 튀어버린 색채는 화폭을 넘어 공간 전체를 형형색색 물들였다. 얕은 밤이 몇 번이고 지난다. 꿈과 현실의 사이를 붓 끝이 가로지른다.
아마도 몇 번이고 또다시 넘어야 할 벽. 눈부시게 찬란한 안정을 향해 그녀는 오늘도 붓을 겨눈다. 캔버스 앞에 서 있는 것은 오로지 작가뿐이지만 그녀의 색은 몇 년이 지나 사람들의 정적을 깨뜨리는 귀감으로 돌아왔다. 끝내 이기는 것은 그녀의 집념.
아득할 만큼 반복한 이별과 잔뜩 생채기 난 마음을 끌고 계속해서 부여잡는 이유는 결국 그녀는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료의 물성을 자꾸만 바꿔가면서도 결코 바꾸지 않는 지독한 믿음처럼. 일그러진 형상 속 이어지는 눈길이 있다.
고희경 작가.
* 2025. 05. 29 제주
고희경 작가와의 인터뷰
Knock! Knock! Who’s there?
2025, 혼합매체, 가변설치. ⓒ고희경.
의문을 품고 다가갔을 때에 비로소 마주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나는 나를 보며 내가 존재함을 안다. 문구멍 속의 나는 지금의 나. 유일하다 생각한 내가 저 속에 살아있다. 존재함은 가히 가벼운 것이다. 주변이 변화하는 형상이라 생각하였는데 나도 변화하는 형상 중 하나였다.
¿Was it a cat I saw?
2025, 혼합매체, 가변설치. ⓒ고희경.
돌아가는 아크릴 판을 비추는 빛, 그에 인해 상이 맺힌다.
상은 겹쳐지기도 완전하기도 하며 형상이 계속해서 변화한다. 형상은 궁극적으로 계속해서 변화함을 말한다. 형상은 자리하지만 언제나 같은 이미지로 남지 않는다. 기억 속의 형상은 현실과 동일할 수 없음을 말한다.
Cactus
2025, 화판에 혼합매체, 181.8×181.8cm. ⓒ고희경.
나의 생각 속의 형상을 보여주며, 마치 꿈 속이나 다른 세상 속 화면처럼 느껴진다. 이 속에서 변화한 것은 색뿐이다. 현실과의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많은 요소가 필요하지 않다. 형상은 어쩌면 나에겐 그런 것이기도 하다. 완전하기보다는 상상에 가까운 이미지로써 형상을 표현한다.
不安定(불안정) #1
2024, 캔버스에 아크릴, 145.5×97.0cm. ⓒ고희경.
나는 불안하고, 불안정한 존재이지만 안정되어 있음을 말한다. 변화한 형상, 반복되는 상은 불안정함을 말하나, 이 속에서 변화한 형상 자체로도 완전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불완전한 형상도 완전할 수 있음을 그리고 자리함을 말한다.
不安定(불안정) #2
2024, 캔버스에 혼합매체, 162.2×97.0cm. ⓒ고희경.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색, 그로 인해 속 안의 베타는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현실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으나, 변화한 색과 반복되는 상은 불안정한 상황을 말한다. 완전한 것과 불 완전한 것의 반복, 상의 반복은 같은 의미를 띤다. 변화하여도 형상은 자리한다.
不安定(불안정) #3
2024, 캔버스에 먹, 아크릴, 116.8×80.3cm. ⓒ고희경.
불안정한 베타, 색과 형태 그 모든 것이 변화한 형태로 자리한다. 그 속의 베타는 불안정한 형태로 자리한다. 이는 필자의 정신적인 부분을 담고 있으며, 그를 이미지화한 것이다. 이는 전과 같이 불완전한 것, 변화하여도 형상은 자리하고, 완전할 수 있음을 말한다.
不安定(불안정) #4
2025, 캔버스에 혼합매체, 162.2×130.3cm. ⓒ고희경.
형상은 나에게 일그러져 있거나 소실되고, 변화한다. 형상은 필자에게 정확한 이미지 전달의 의미가 아니다. 모호함을 말하고 변화한 상을 보여주며 형상의 반복과 모순됨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