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진
이 : 요즘 어떻게 지내나. SNS로 근황이 종종 들렸다.
심 : 이직 준비에 정신이 없다. 처음으로 관심사가 있는 회사로 가는 거라 떨리기도 한다.
이 : 관심사?
심 : 마케팅 업무긴 한데 영상 편집도 할 수 있고 포토샵도 할 수 있는 회사다. 이전에는 일이라고 해도 내가 하고자 한 업무랑은 결이 달랐다.
이 : 사전 질문에서도 계속 영상 창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묻고 싶던 주제다. 근데 영상 창작이라 하면 너무 포괄적인 범주니까, 어떤 영상을 말하는 건지도 궁금하다. 이를테면 영상만 해도 촬영 감독, 편집팀, 음향팀, CG 팀까지 다양하지 않나. 총감독도 있을 것이고.
심 : 내가 막 영상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미술 감독이 하고 싶었다. 그러다 연기를 해서 찍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때도 있었고. 연기 생활을 하다 보니 연출에 재미를 느꼈다. 현장에서 통솔을 하는 역할이니까. 찍고 싶은 것을 찍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그러다 현재는 영상 편집 쪽으로 관심사가 넘어갔다. 편집 자체에 재미를 느끼고 있기도 해서.
이 :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나.
심 : 예능적인 것에 요즘은 좀 더 관심을 두고 있는데. 나중에는 3D를 배워서 CG 파트로까지 나가고 싶다. 아트 디렉터처럼 모든 걸 총괄하는 파트로 진출하는 게 최종 목표다.
이 : 영상에 대한 관심이 큰 게 보인다. 장르가 바뀌고 있는데도 계속 영상이라는 틀 밖으로 나가진 않아서.
심 : '영상을 언제부터 하고 싶었을까?' 혼자 생각해 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애니메이션 작가가 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애니메이터지. 옛날에 하고 싶었던 걸 어찌 보면 까먹고 있다가 불현듯 생각이 난 셈이다. 그때부턴 일관되게 관심이 있었다.
이 : 영상 창작에 왜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겠다. 그렇다면 연기는 갑자기 왜 관심이 생겼는지 궁금해지는데. '심현진'이라는 사람의 인생에 '연기'라는 터닝포인트가 등장한 순간이 있었나.
심 : 나는 원래부터 찍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늘상 창작만 하는 사람이었는데, 창작물 속에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 찍혀보니 너무 재밌었다.
이 : 그런 흥미를 느끼게 된 첫 번째 작품이 있나.
심 : 대학교 때 영상 과제였던 것 같은데. 그때의 짧은 연기가 첫 시작이었다. 영상 만들면서도 잘 찍혔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고 찍히는 과정도 무척 재미있었다. 연기는 다양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몹시 매력 있는 장르기도 하고. 예를 들어 나는 대학생인데 교복을 입는 순간 고등학생이 되니까. 역할을 해내는 것에 따라오는 재미가 있다. 그때 처음으로 안 하면 후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 아, 사전 인터뷰 답변을 읽으며 궁금했던 게 있었다. 물어봐도 되나?
심 : 뭐라고 썼었지? 말해달라.
Q1. (공통) 2022년, 작업이나 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A1. 생일 선물로 연기 학원을 등록했다. 본가인 영주와 학원이 있는 서울을 왔다 갔다 이동하며 살았다. 연기는 참 어려웠다. 지금까지 작업을 하면 작품 뒤에 숨어 감정과 심경을 표현했다면, 연기는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줘야 해서 더욱 그랬다. 딜레마에 빠져서 허우적거렸다. 근데 그 모습을 좋게 보는 분들도 있더라. 좋은 기회로 독립영화에 출연도 해보고, 대학생 과제 작품에 주인공이 되는 기회도 있었다. 내가 느끼던 걸 혼자 작품으로 그려 내기만 하다가 연출 감독과 다른 스태프들과 함께 맞춰 작품을 만들어 내는 점이 특히 좋았다.
이 : 이 글에서 궁금했던 파트는 특히 이 부분이다. '연기는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줘야 해서 더욱 그랬다'. 나는 연기 전공자도 아니고 관련자도 아니어서 나에게 연기는 '역할을 수행하는' 직업이다. 근데 딜레마가 온 이유가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라니. 나에게는 둘이 매치가 잘 안 되어서 이해하는데 고생을 좀 했다.
심 : 연기를 하다 보면 화도 내야 하고, 울어야 할 때도 있고, 웃어야 할 때도 있다. 근데 나는 나 자체가 화를 잘 내지 못하는 사람이거든. 세상 살며 누군가 시켜서 웃는 경우도 많지는 않으니까. 근데 작품 속에서는 내가 화가 나면 화나는 감정을 곧이곧대로 그려야 한다.
이 : 어렵다.
심 : 더 쉽게 설명하면 회화 작품을 할 때는 작품을 하다가 화가 나면, 그 화를 붓 터치를 통해 그려서 보여주면 될 일이다. 그럼 작품에 그 당시의 감정이 담기는 거다. 근데 연기는 역할을 받는 순간부터 그 역할이 내가 된다. 어떻게 보면 나는 이 역할이 단순한 '연기의 대상'은 아닌 거다, 내 시점에서는. 역할을 받는 순간 그냥 내가 되어버리니까.
이 : '소희'를 연기할 때는 현진이 아니라 소희가 되어버리는 건가.
심 : 맞다. 근데 작품 속에서 소희는 화를 내고 있는데 나는 그걸 못하는 사람이니까. 소희는 화를 내고 있는데 현진은 그게 안 되니까. 그게 너무 어려웠다.
이 : 둘 사이의 간극이 있었구나.
심 : 그게 딜레마였던 거다. 역할을 부여받은 뒤 생기는 또 다른 '나'. 근데 연기할 땐 이입을 못하면 안 되거든. 이입을 못하는 순간 연기를 잘 못하는 거다.
이 : 한 번도 이렇게 접근을 안 해봤는데. 진짜 흥미롭다.
이 : 이번엔 주제를 좀 바꿔보려 한다. 당신은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많은 업을 거친 사람이다.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서의 타지 생활도 오래 했고.
심 : 아무래도 그렇겠다. 제주랑 서울, 두 곳에서 있었으니까.
이 : 두 지역에 차이가 있었나? 외부적 환경이 심리적인 부분에까지 도달했는지 궁금하다.
심 : 글쎄, 꽤 오래전이라. 둘 다 설레긴 매한가지였다. 내 꿈을 위해 나온 건 마찬가지니까. 제주를 간 것도 작가를 하겠다는 꿈 때문이었고, 서울에 온 것도 연기를 하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다. 한 편으론 외로움도 컸다. 제주도는 동기들이 있어 괜찮았지만 가족이랑 떨어진 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본질적인 외로움이 있었다. 서울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생기는 외로움이 있었다.
이 : 군중 속의 고독 같은 건가.
심 : 가족이랑 떨어지는 것도, 친구들이 다 흩어진 것도 괜찮은데. 혼자 있는 게 너무 싫었다. 이전엔 좋아했던 것도 같은데 서울에 온 뒤부터 싫어지기 시작했다.
이 : 이방인으로서 감정이 외로움이라면, '매료'라는 감정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매료되는 순간이 잦은 편인가? 만약 잦지 않더라도 순간 매료된 것에 깊게 빠지기도 하나. 당신의 노트를 읽고 있으면 자연히 나의 지난 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 혹은 누군가의 결과물에 대해 순간적인 매료를 느낀 감정이 있었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예스'다. 감각적인 인상에 충격을 받고, 매료가 되고. 난 그게 삶의 동력까지 이어지는 편이라서.
심 : 바로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순간적인 매료를 잘 느낀다고 생각했지만 연기도 생각해 보면 오래전부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작금의 흥미로까지 이어진 거다. 한 사람이 많은 직업군의 역할과 위치를 다 해볼 수 있다니! 그게 너무 부러웠다. 나는 영주에 사는 시골쥐인데 연예인이라는 세계는 도시 쥐 같은 인상을 주니까. 근데 한 번 찍어보니까 '나라고 왜 못해?' 하게 됐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불우한 어린 환경을 가진 사람도 배우로 성공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 않나. 직업군이 아예 달랐던 사람도 그렇고. 서울에 사는 배우 지망생들만 배우가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하고 싶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만 그려서 도전조차 할 수가 없었는데. 근데 이게 순간적으로 사고의 과정 속에서 '아, 배우를 해야겠다' 생각이 드는 게 아니고 생각해 보니까 나 이랬네? 싶은 거다. 순간적인 좋아함이 아니라 꾸준히 뭔가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지. 당시에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까 이게 사랑이고 좋아하는 것들이고 추억이다.
이 : 근데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 나는 좀 의아하다. 사랑이라고 이름 붙였기 때문에 사랑이 된 느낌? 뭔가 당신이 눈길이 가는 게 생기면 과거의 순간들을 되짚어 '이럴 줄 알았어. 과거에 나 이랬다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뭐랄까, 지나온 삶의 흔적들이 남긴 누적된 취향의 단면을 현재의 당신이 지나갈 때마다 발견하는 것 같고, 발견할 때마다 쏟아지는 감정의 폭이 깊은 것 같기도 하고.
Q2. 2025년, 이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업이 지난 4년과 가장 크게 다른 지점은 무엇인가요?
A2. 예전 작품들은 대부분 꿈, 미래에 관한 두려움을 소설로 적어서 다시 작품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래보다는 과거의 감사함을, 소설보다는 나의 삶에 집중하며 시작했다. 서울에 혼자 있다 보니 가족들과 주위에 소중한 인연들이 자주 생각나더라. 날 지금까지 살아 있게 해 준 사람들이 그들이지 않을까 했다. 서울은 참 다양한 사람이 많아서 점점 작아지는 게 있다. 점점 내 존재가 희미해져 갔다. 스스로를 아껴주지 못했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날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다고. 그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면 나 스스로를 사랑하며 살아야겠더라. 이번 작품은 두려움도 없고, 지어낸 이야기로 도피하는 것도 없다. 사랑하는 것에 감사하며, 오로지 내 이야기로만 가득 채웠다.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게 되었다.
이 : 사전 인터뷰에서 '이번 작품은 지어낸 이야기로 도피하는 것도 없다'라고 하지 않았나. 나는 이 부분이 굉장히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같이 작업실을 쓰던 2021년을 돌이켜보면 '꿈' 세계관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굉장히 탄탄해서 나는 당신이 도피를 한다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심 : 그 당시에 환경에 관한 시리즈를 냈었는데, 그건 확실히 도피에 가까웠다.
이 : 크레파스 작품?
심 : <전제 : 전남대 제주대 교류전>에 냈던 작품.
이 : 나 그 작품 중에 하나 샀었는데. 그것도 가난한 대학생 시절에, 꽤 큰돈을 주고.
심 : 그땐 직접 쓴 소설을 배경으로 작품을 만들었는데 어찌 보면 나의 당시를 소설을 거쳐 내놓은 것이다. 아까 전에 말했던 것처럼.
이 : 지어낸 이야기로 도피하는 것.
심 : 지어낸 이야기. 사실 그건 나 자신인데도 내가 지어낸 이야기인 것처럼 작품을 선보였다. 그에 비해 이번 작품은 거치는 과정 없이 진짜 내 일기장을 보여주듯 내보인다.
이 : 이것과 별개로 또 궁금한 게 당신과 대화를 하다 보면, 당신의 글을 읽다 보면 긍정과 부정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이를 테면 ‘도피’와 같은. 도피는 확실히 부정적 어감을 가지고 있는 단어인데. 방금 우리가 나눈 대화만 보더라도 ‘지어낸 이야기로 도피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나의 현실을 세련되게 풀었다’고도 볼 수 있을 텐데도, 당신은 가치 판단을 굉장히 세게 하는 느낌을 받아서. 중립적으로 읽는 게 아니라 확실한 판단을 내리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그래서 당신이 가장 축으로 삼는 기준이 뭔지 궁금했다.
심 : 아까 전 내가 말했던 시리즈를 예시로 들면, 소설 속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나’다. 세상에는 혐오하고 오염시키고 폭력적인 사람들이 많지 않나. 근데 나는 이러한 현실에 부딪혀야 된다고 끊임없이 생각하는데도. 어떻게 보면 항상 회피하고 살았던 것 같다. 이걸 내 얘기로 보여줄 수 있음에도 소설로 보여주니까. 내 얘기가 아닌 것처럼 굴고.
이 : 방식론 차이로 읽히기도 하는데. 당신의 노트를 보면 사상과 가치에는 사랑에 대한 언급이 굉장히 잦은데, 언어만 따지고 보면 부정어와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는 말이 너무 많아서. 어찌 보면 당신의 말습관 같기도 하다.
심 : 타인이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배여서 내면이 글자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Q3. 작가님의 작가노트를 보면 긴 원통, 겉표지 등 타인과의 연관에는 부정적인 묘사를, 구멍과 비즈, 거울 등 자신의 내면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요소는 긍정적인 묘사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구멍 역시도 타인이 제외됐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구멍은 내면과 타인을 연결시켜 주는 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금합니다. 작가님에게 있어 '타인'은 어떤 존재인가요?
A3. 어떻게 보면 비즈 또한 타인이 만들어주는 경험과 추억이라 볼 수 있다. 타인이라는 존재로 인해 내 인생은 채워진다. 무엇으로 채워졌든 만화경 내면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그걸 제일 처음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이다. 타인은 만화경 겉만 보고 판단할 수도 있는 존재고. 꼭 내면을 볼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런 타인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내면이 아름답다 여기고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느끼는 건 자신이 되어야 할 뿐. 그 주체가 타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타인이 그걸 판단하는 순간 자신의 만화경 내면은 겉표지와 다르지 않다. 내가 가장 먼저 봐야 할걸, 타인에게 보라고 권유만 하는 타인 중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타인이라는 존재가 어떤 비즈를 나에게 주는가, 그것으로 내 내면이 얼마나 더 풍부해질 수 있는가. 풍부해진 내면을 난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결정하는 건 결국 스스로다.
나에게 타인은 비즈를 주는 사람이다. 나에게 타인이 없다면 결코 내면이 풍부해지지는 못 했을 것이다. 아름답다 결정하는 사람이 아닌 아름다울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 그들이 없다면 난 내가 아름다웠는지도 사랑받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이 : 당신의 답변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타인에 대한 상반된 시선을 둘 다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답변을 쭉 읽고 있으면 상반된 문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긍정) 타인이라는 존재로 인해 내 인생은 채워진다.
(부정) 무엇으로 채워졌든 만화경 내면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부정) 타인은 만화경 겉만 보고 판단할 수도 있는 존재
(긍정) 하지만 그런 타인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이 : ‘타인이라는 존재로 인해 인생이 채워진다’는 말만 들으면 타인의 존재감이 매우 크게 느껴지고 존재 목적도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무엇으로 채워졌든’을 통해 타인의 존재감은 순식간에 약해진다. 또한 타인은 ‘겉만 보고 판단해 버릴 수도 있는’ 존재이나 그렇다 하여 타인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이 : 함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내면이 아름답다 여기고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느끼는 건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 주체가 타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장이다. ‘안 된다’는 말이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어서 눈길이 갔다. 묻고 싶기도 하고. 왜 타인이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건지. 현진 작가의 말에는 모호함이 없다.
심 : 일단 그렇게 봤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나는 나 자신을 굉장히 모호한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어서. 왜냐면, 난 내가 나를 못 믿기 때문이다. 나도 나를 못 믿는데 타인이 나를 어떻게 믿겠나.
이 : 그런가? 나는 원래 생각이 단순해서 그런가. ‘현진 작가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이상 추가적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 자체가 겉만 보고 판단하는 무심일 수도 있겠다.
심 : 나는 완전 반대다. 타인에 대해 정은 크게 두지 않아도 신경은 많이 쓰는 편이라. 어떻게 보면 나는 나를 못 보는데 타인은 나를 볼 수 있으니까. 내가 나를 못 믿으니까 타인이 보는 내가 정답인가 싶고.
이 : 당신의 작가노트를 보고 있으면 무슨 사랑이 가득한 어르신의 조언처럼 보이는데 사전 인터뷰를 읽으니 ‘사랑하셔야 돼요’라는 당부의 말의 대상이 전부 작가 본인이다. 솔직히 나는 도피와 숨긴다는 건 여기에 붙여야 되는 게 아닌가 싶다. 타인에게 하는 말인 것 같지만 전부 작가 본인한테 하는 말이니까.
심 : 쓰면서 느꼈다. 나한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이 : 어쩌면 자신한테 하는 세레나데처럼 들리기도 했다. 수신인과 발신인이 단 한 명인.
심 : 아니다, 나는 참조인이다.
이 : 참조인?
심 : 나한테 하는 이야기는 나만 알면 되니까. 이 글은 애초에 관객들을 위해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은 글이기 때문에. 이 글이 오로지 나를 위한 얘기일 수도 있다는 것은 나 혼자 느껴도 되는 거니까. 관객까지 그런 점들을 알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 : 이런 점이 재밌는 거다. 작가노트만 보면 따뜻한 이야기로 가득하지 않나. 김혜자 선생님처럼. 근데 막상 현실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굉장히 짙다. 진공포장이라는 방식 자체도 내 소중한 부분은 절대 손댈 수 없다고 표시하는 것만 같다.
심 : 근데 그 소중함이 내가 아니라 타인을 가리킬 수도 있는 거다.
이 : 글쎄, 타인 그 자체라기보다는 ‘작가가 바라본 타인’ 같다. 왜냐하면 여기에 타인을 담았다고 하기에는 당신도 타인을 모르고 타인도 당신을 모르기 때문에.
심 : 타인이 내가 바라본 것과 다를 수는 있지만 타인에게도 만화경과 같은 삶이 있을 수는 있으니까.
이 : 하지만 당신은 만화경을 표현할 때 ‘텅 빈 원통’이라고 묘사한다. 결국 그 텅 빈 원통을 사랑의 조각을 작가가 수집해서 채워나가는 것 아닌가.
심 :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조각을 수집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만화경이 있는 셈이지. 내 작품을 보고 공감을 할 수도 있고, 잊고 있던 사랑의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는 거니까. 진공포장 속에는 내가 힘들었을 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물건들도 빠짐없이 담겨 있다. 근데 돌아보면 그때 힘은 들었지만 만약 안 했더라면 난 후회했을 것이고, 지금의 나까지 다다르지도 않았을 거라서. 힘들었던 일도 지나고 보면 나를 위한 성장이었고 그것 또한 사랑이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라보는 관객도 이런 깨달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희망을 얻고 아름다운 삶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만화경 시리즈는 이런 뜻을 담은 시리즈다.
이 : 마무리하기에 앞서 작품을 중심으로 몇 가지 질문을 더 해보려고 한다. 현재 작품과 과거 작품의 시각적인 공통점을 말해줄 수 있나.
심 : 예전 작품은 소설로 접근했다. 지금 작품은 일기장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 언어적인 텍스트.
심 : 맞다. 텍스트일 수도 있지만 결국은 내 작품에는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
이 : 그럼 작가의 입장으로 만화경 시리즈를 볼 때 사람들이 주목해주었으면 하는 시각적인 포인트가 있나.
심 : 작품 사이사이에 필름 사진이 함께 들어갈 예정이다. 그걸 재밌게 봐줬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진이기도 하고, 그 사람들이 나에게 좋은 추억과 건강한 사랑을 준 것이기 때문에. 그들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기도 해서. 관객 역시도 그러한 부분에 주목하면 좋겠다.
작가와 나는 오래된 친구이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를 넘어 그녀가 소중한 사람을 이야기할 때면 나는 괜스레 우리의 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그녀가 분명한 목소리로 확신을 이야기할 때면 나는 경건해진다. 문장의 단어를 쪼개어 분석하면서도 동시에 조금의 모호도 없는 온점을 바라본다. 작가의 세레나데 - 환상의 만화경을 엿볼 수 있음에 감히 감사를 느끼며.
그녀는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다 말하였지만 나는 그럼에도 함부로 그녀를 믿어버린다. 아무리 다르게 보고자 해도 나에게 그녀는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만드는 사랑 이야기는 골몰과 성찰로 군데군데 잔멍이 들어있지만 그럼에도 귀감이 될 것이다.
사랑은 어렵다. 긍정적인 삶을 유지하고자 해도 낙관의 태도는 금세 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심현진 작가는 특유의 분명함으로 몇 번이고 촛불을 켠다. 촛불의 테두리 속에서는 불을 켜는 작가가 가장 가깝지만 은은한 불빛과 온기는 많은 이를 아우른다. 이처럼 그녀의 속삭임이 나를 비롯한 많은 이에게 전달되길 바란다.
심현진 작가.
* 2025. 05. 27 서울
심현진 작가와의 인터뷰
만화경
2025, 혼합매체, 가변설치. ⓒ심현진.
만화경의 부품을 진공 포장하여 둘 것이다. 만화경의 부품은 총 5가지가 있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삶을 보여주는 긴 원통.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말해주는 겉표지. 삶의 내면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구멍. 삶 속에서 내가 사랑했던 것을 의미하는 비즈. 내면이 풍부해질 수 있도록 하는 거울.
이것으로 탄생과 죽음으로 끝나는 삶에서 우리가 그 안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고찰하고,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 나누며 살길 바란다.
만화경 만들기 I, II, III
2025, 영상, 3분. ⓒ심현진.
각기 다른 세 가지의 방법과 재료는 다른 결과물로 보여진다. 결과물이 다르더라도 주목할 점은 모두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은 자신만이 만들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것은 어렵지 않다. 어릴 적 과학 시간에 만드는 만화경처럼 쉽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예쁜 비즈를 담으며, 커져갈 행복을 기대하며, 사람들이 끝까지 만들길 바란다. 삶을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