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온유
이 : 근황을 공유해 달라. 간간이 들은 소식으로는 친구와 작업실을 함께 쓴다고 들었다.
온 : 맞다. 친구 A와 함께 작업실을 쓰고 있다.
이 : 작업실을 같이 쓰면 일상에 A의 영향이 안 미칠 수 없겠다.
온 : 나는 혼자서 일 벌이는 걸 잘 못 하는 타입인데, A는 일을 잘 벌이는 타입이다. 그래서 요즘은 그 친구가 벌인 일을 같이 따라 하고 있다. 애초에 나는 혼자서 일을 벌이기까지의 실행 과정이 진짜 오래 걸리는데 A는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 없이 그냥 일을 벌인 뒤에 웃는 사람이라 덩달아 같이 하게 된다.
이 : 즐거워 보인다.
온 : 그렇게 둘이서 일 벌이고, 무언가를 주워 오고, 사 먹고. 워크숍에 참여한다거나 모르는 사장님과 얘기를 나누기도 한다. 다양한 사람을 많이 만났다. 작년과 올해를 생각하면 다양한 사람을 정말 많이 만난 해다.
이 : 워크숍 이야기를 좀 더 풀어달라. 궁금하다.
온 : 창원은 예술 커뮤니티가 되게 좁아서 건너 건너 다 안다고 보면 된다. 특히 귀여운 곳들. 그런 곳은 사장님끼리 다 연결이 되어 있다. 인스타만 봐도 밑에 추천 계정 같은 것들이 뜨니까. 다 서로서로 알 수 있는 구조인데.
이 : 흥미롭다.
온 : A가 교류하는 카페의 사장님이 내 요리 계정(@lunchdinnercooking)을 봤다고 하더라. 마침 그 공간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시는 분이 워크숍을 한다고 해서 옆에서 디저트를 같이 팔면 좋겠다고 얘기가 나와 진행하게 되었다. 비슷한 컨셉으로 도자기 관련 워크숍도 진행할 것 같다.
@lunchdinnercooking / 장온유 작가의 요리 계정
이 : 제주도에서는 완전 미술계에 속해있지 않았나.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이 더 활발해 보인다.
온 : 나한테는 모든 게 다 예술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사실 시각적으로 보는 것 자체가 예술이다. 귀여운 작은 것을 만든다던가, 글을 쓴다던가. 뜨개질 모임을 하거나 집에서 설거지를 하는 것, 노래를 잠시 듣는 것, 산책을 하는 것…. 그냥 나에게는 다 예술을 향유한다는 느낌이 드는데 예술인이라는 범주에 한정되어 있으면 답답해진다. 고리타분하다는 인상이 들고 여기서 대체 어떤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재미가 없다고 해야 하나.
이 : 재미라는 말이 나에게는 좀 두루뭉술한데. 재미의 기준이 따로 있나.
온 : 기준이라…. 이를테면 새로움이라 할 수 있겠다. 새로움과 배움! 어떤 걸 보았을 때 ‘이거 좀 새롭다’ 던가, ‘이런 건 작업으로써 또 이렇게 연결될 수 있겠다.’ 같은. 식물성 재료 같은 것을 보면 텍스쳐가 응용하기 좋은 게 많아서 그런 걸 보면 재밌다는 생각이 자연히 든다. 오히려 미술에 너무 국한되어 있으면 물감, 캔버스 등 재료가 한정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배움도 없고 교류를 한다고 해도 재미가 없다.
이 : 재미에 대한 얘기가 계속 나와서 더 깊게 들어가 보고 싶다. 나중에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따로 있나?
온 : 내 취미가 물건을 싸게 사거나, 무료 나눔을 받는 거다. 근데 이런 걸 자주 보다 보면 ‘당근마켓’과 ‘번개장터’는 또 다른 걸 알 수 있다. ‘당근마켓’에는 번개장터에는 없는 감성이 있다. 뭐랄까, 좀 어이없는 감성. 뜬금없이 ‘오래된 꽃무늬가 그려져 있는 멋쟁이 컵’ 이런 키워드? 이런 이미지가 내겐 재미있어서, 수집하는 걸 하고 싶다. 약간 인간적인 이미지. 걸러지지 않는 순수한 느낌의.
이 : 그런 이미지는 거리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시장만 봐도 ‘3천 원’에서 ‘2천 원’으로 깎은 손 글씨를 흔히 볼 수 있지 않나.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온라인이 오프라인보다 더 정제를 많이 시키는 느낌이 든다. 불특정 다수에게 확실하게 노출될 수 있는 곳이라 그런가. 온유 작가의 프로젝트는 온오프라인의 경계에 있는지 궁금하다. 아니면 아까 얘기했듯 ‘당근마켓’처럼 완전히 온라인 이미지에 관심을 두고 있나?
온 : 온오프라인 상관없다. 그냥 인간적이고 순수성을 띤다면 된다. 진짜 뜬금없어서 피식 웃음 나오는 그런 것들 있지 않나.
이 : 얘기를 들어보니 이미지 자체에 대한 흥미도 있지만 물건 자체에도 흥미가 있는 것 같다.
온 : 맞다. 물건 자체에도 흥미가 있다. ‘당근마켓’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거긴 굉장히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몇십 년 동안 사용을 했는데 어떤 부분으로 인해 문제가 생겨 싸게 판매한다던가, 외국에 가게 되어 급처한다던가, 아들이 쓰지 않는 물건들까지. 물건을 판매하면서 생활에 대한 부분도 함께 공유를 하는 셈이다. 그런 스토리를 읽고 물건을 보면 또 다른 시야가 생겨난다.
이 : 일개는 그러한 스토리를 되려 성가셔하기도 하는데. 이런 부분에 특히 흥미를 느끼는 게 인상 깊다.
제주 햇당근. 손으로 쓴 가격표가 돋보인다.
사전 인터뷰 질문
Q1. 2025년, 이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업이 지난 4년과 가장 크게 다른 지점은 무엇인가요?
A1. 과거에는 지나간 것들을 붙잡으려는 시도가 많았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그걸 느슨하게 붙잡고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쪽으로 조금씩 옮겨 왔다. 형태보다는 구조, 감정보다는 거리 같은 것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 작업이다.
이 : 과거와 지금의 차이가 붙잡음의 정도인 게 눈에 띈다. 붙잡는다를 아예 다른 언어로 바꾼 게 아니라 ‘느슨하게’ 라는 말을 앞에 붙여 구분을 줬다. 뭐랄까, 이 답변을 보고 가장 궁금했던 건 느슨하게 붙잡는 방식이다. ‘기억’ 같은 대체어를 사용한 게 아니라 ‘느슨하게’ 붙잡는다니. 꽉 붙잡는 건 매여 있음으로 읽히는데 느슨하게 붙잡는 건 상상이 잘 안 간다.
온 : 매여 있는 개념이 아닌데. 느슨하게 붙잡는 건 살포시 붙잡는 거다. 약간, 떨어지기 싫은 느낌처럼. 예를 들어 엄마랑 쇼핑하러 간 아기가 사람이 많으면 살포시 옷자락을 잡듯이. 집착의 느낌이 아니라 살포시 잡아 내 삶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주는 그런 느낌이라 보면 된다.
이 : 그럼 더 궁금해지는 게, 그럼 지나간 것을 삶과 연결시키는 매개는 기억이 되는 건가? 예를 들어 떠나간 인연을 떠올릴 때의 연결이 시절 인연과의 직접적인 연결은 아니니까. 오히려 시절 인연이 남긴 것들에 대한 연결에 가깝게 들린다. 미련도, 기억도 아닌 자연스럽게 남아버린 것 같달까. 꼭 체취 같기도 하다.
온 :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장온유 작가.
이 : 아예 다른 주제로 전개해 보려 한다. 사전 인터뷰 질문에서 2021년부터 2023년까지의 일상을 묻는 질문이 있었는데 그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기억에 남는 것부터 말해보자면 나는 당신이 해준 닭발 요리가 기억에 남는다.
온 : 그랬나?
이 : 그랬다.
이 : 내가 저 질문을 던진 이유는 이방인으로서 생 타지에 가까운 제주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어떻게 적응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창원과는 분명하게 다른 동네인데. 의지가 되는 공간이 따로 있었나?
온 : 나한테는 오일시장이 딱 그랬다. 요즘 마트는 잘 되어 있긴 하지만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으니까. 비싸기도 비싼데 일단 애들이 너무 깔롱지게 생겼다. 깨끗이 세척돼서 반짝반짝 빛나는 애들. 그런 것들을 보다가 오일장에 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흙 묻은 애들 사이에서 부담 없이 그냥 말하면 되니까. “제가 혼자 살아서 그러는데 이거 삼천 원어치 말고 천 원어치만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면 그걸 또 천 원어치로 해주신다. 언제는 젊은 아가씨가 야무지게 산다고 칭찬도 받았다.
온 : 마트는 센서로 가격을 띄우는데 오일장은 자기의 손 글씨로 매대를 만든다. 설명도 덧붙이고. ‘당근마켓’처럼. 반짝반짝 신선한! 그런 걸 보는 재미도 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디스플레이다.
이 : 애로사항은 없었나.
온 : 있었지. 전에 살던 자취방은 곰팡이가 자주 피었다. 밖의 단열재가 안 좋아서 그런지 밖이랑 안의 온도차가 커서 결로가 진짜 심했다. 결로 때문에 곰팡이가 벽에 진짜 잘 펴서 힘들었다. 그리고 제주도 가스비. 너무 비싸다.
이 : 그땐 도시가스가 안 깔렸으니까.
온 : 나는 가스가 그 정도로 비쌀 줄 몰랐다. 그때 난 가난했기 때문에 매일 추운 겨울날을 보내는 거다.
이 : 너무 슬픈데.
온 : 확실히 습도도 다르고. 육지에 오랜만에 딱 가는 순간 바로 ‘어, 뭐야? 왜 이렇게 건조해?’ 바로 이렇게 된다. 집은 또 얼마나 따뜻한지. 제주도에서는 거의 두 겹씩 입고 겨울을 보냈는데 창원에서는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다닐 수 있다.
이 : 따뜻한 동네에서 추운 겨울을 보낸 셈이다.
온 : 그래도 나는 확실히 섬나라를 좋아한다. 그냥 남쪽이 좋다. 물도 많고 식물도 많은.
이 : 다시 돌아올 생각은?
온 : 아직까진 없다. 내가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게 새로움이니까. 어떤 것에 대한 호기심도 그렇고.
이 : 창원은 그런 부분이 잘 되어 있나. 한국의 특성상 아무래도 서울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온 : 새롭다는 걸 생각하면 보통 서울을 생각하지만 서울은 나에겐 너무 부담스러운 도시다. 정제되고 세련되고. 인스타 감성.
이 : 을지로 안 좋아하겠다.
온 : 약간 합성 섬유 같은 느낌이랄까? 나한테는 창원이 제일 적당한 것 같다. 코튼, 리넨 같은 느낌.
이 : 이런 얘기가 듣고 싶었다. 제주를 기점으로 거쳐 간 사람의 이야기.
온 : 그냥 엄청 다른 것 같다. 같은 한국인데도 제주도만 진짜 다른 나라 같다. 괜히 탐라국이 아니라니까? 향토적인 것도 그렇고 제주도만의 제사 문화도 그렇고. 진짜 충격이었던 건 결혼할 때 케이블 방송에 누구랑 누가 결혼한다고 방송에 나오는 거다. 아직도 그러나?
이 : 제주는 결혼식도 두 번 한다. 결혼하기 전에 잔치 한 번 열고, 그다음에 결혼식.
온 : 끝내준다.
장온유 작가의 작업실.
이 : 본격적인 작업 얘기로 들어가 보면, 주제는 어떻게 선정하는 편인가? 어떤 작업 라인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는지 궁금하다.
온 : 계속 생각나는 단어들이 있다. 단어가 떠오르면 일단 적어둔다. 그렇다면 또 생각이 들겠지. 왜 이런 것들이 계속 생각이 날까? 왜 이 단어에 갑자기 꽂힌 걸까. 어떠한 영향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걸까.
이 : ‘매미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결론부를 정해둔 것이 아니라, 매미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고 점점 들어가는 방식이었겠다.
온 : 한 단어에 꽂히면 논문도 찾아보고 이런저런 이야기까지 다 찾아본다. 그러다 글도 쓰는 거고. 글 쓰다가 주제에 더 큰 흥미를 느끼면 시각적으로 표현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런 작업이 시각적인 결과물까지 같이 나오는 거고.
온 : 내가 좀 파고드는 걸 좋아한다. 근데 금방 관심이 꺼지는 것들도 많다. 그래서 중간에 사라지는 주제들도 꽤 있고. 이번에 하는 작업은 꺼지지 않은 관심의 결과다.
이 : 중간에 삭제되는 관심사라니. 재밌다. 그럼 단어는 계속 떠올랐는데 끝까지 가지 못하고 사라진 것들도 있나.
온 : 폴라로이드 인쇄 방법이 그랬다. 음악과 수학의 관계성에도 관심이 있었고. 한때 수학에 진짜 빠졌었다. 함기석 시인의 ‘오렌지 기하학’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름부터가 너무 흥미로웠다. 텍스트는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이 있다.
이 : ‘오렌지 기하학’.
온 : 그래서 그 시집을 읽었는데 와, 그 시집은 그냥 한 편의 현대미술이다. 그래서 이분을 알아보다가 수학에 빠진 거다. 그래서 한때 맹거 스펀지 이론이라던가, 피보나치수열이라던가, 양자역학 같은 것들에 대해 푹 빠져 있었다.
이 :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흥미롭다.
온 : 이불 텐트라는 단어에도 한 때 꽂혔었다.
이 : 이불 텐트?
온 : 갑자기 그냥 생각난 단어다. 적다가 또 이거에 대한 분석을 해봤다. 어렸을 때는 이불로 아지트를 짓는 걸 많이 하니까. 이와 관련된 논문을 읽었는데, 논문의 저자가 말하길 이불 텐트는 인간이 가상공간을 자연적으로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한다. 가상공간을 추구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는 거지. 어쩌면 사람들이 지금 가상공간을 구축하는 데까지 도달한 이유도 이런 걸까 싶고.
장온유 작가의 단어 노트. 폴라로이드 인쇄에 대한 부분을 다루고 있다.
사전 인터뷰 질문
Q2. 사회는 칼날을 정리하지 않고, 버릴 필요 없는 칼날을 만들어 문제 자체를 없애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정리되지 못한 칼날은 여전히 벽 안에 있으며, 결국 기억에서도 잊히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 방식은 ‘처리 완료’로써 효율적인 방법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작가님은 칼날 처리에 대해 고민을 할 필요 없는 지금 이 결론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계신가요?
※ 1903년 질레트가 일회용 칼날을 개발하였지만, 그 당시 사용하던 일회용 칼날은 쉽게 오염되고 ‘철’로 만들어져 버릴 방법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에 대한 처리 방식으로 화장실에 구멍을 뚫어 벽 안에 던져 넣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회피적 처리 방식이지요. 지금의 화장실에서는 그런 구멍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는 1970년대 중반 ‘빅’에서 출시한 면도기 덕분입니다. ‘빅’에서 출시한 면도기는 칼날을 분리해 버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면도기가 상용화되며 ‘면도기 칼날’ 구멍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 면도기 칼날 구멍에 관한 리서치
A2. 지금은 칼날을 꺼내지 않아도 되는 시대라고 말하지만, 그게 정말 해결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보이지 않게 만든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 작업에서 칼날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다루기 어렵다고 여겨지거나, 시스템 밖으로 밀려난 존재들을 상징한다. 벽 안에 쌓여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처리 완료’라는 말로 덮어버리는 방식은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마주하게 될 문제들을 더 깊이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 상징이라는 말이 인상 깊다. 칼날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된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향이라는 게 가족, 친구, 연인처럼 가까운 관계도 있지만 뉴스 속 사건처럼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나. 그중에서 특히나 영향을 많이 받는 게 있나. 관심을 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흥미가 가는 부분이 있고 상대적으로 덜 흥미로운 주제가 있다면? 흥미가 가지 않는 파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말해주면 좋을 것 같다.
온 : 정제된 것. 정제된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예를 들어 세척된 당근이 있고 못난이 농산물이 있다면 나는 정제되지 않은 순수한 당근을 고른다. 사람 자체도 그렇다. 뭔가 꾸며내고 포장하는 사람들은 바로 알아챌 수 있다. 가식인지 아닌지, 꾸며낸 건지 아닌지. 그래서 순수하고 꾸밈없이 이야기하는 그런 것들에 대한 신선함이 크다. 정제된 것은 일단 하나도 신선하지가 않으니까.
이 : 그렇다면 온유 작가가 생각하기에 순수는 곧 꾸밈없음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나. 나는 꾸밈없음도 하나의 마케팅이 되는 시대라고 본다. 꾸밈없음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러한 니즈를 분석하는 사람도 있을 법한데.
온 : 글쎄, 소재도 그렇고 재료도 그렇고 합성되고 가공되어 만들어진 것보다 자연에서 바로 얻을 수 있는 그런 것들을 만지고 봤을 때 심적으로 제일 편안하다.
이 : 자연적인 것에 대한 끌림으로 보아도 될까.
온 : 그런 것일 수도.
이 : 나는 ‘면도기 칼날’ 구멍에 대해 리서치하며 제일 앞섰던 감정은 분노였다. 손해 보는 사람들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읽으면서 좀 화가 났다. 그래서 무관심한 사람들의 태도를 봤을 때 작가의 감정선도 궁금했다. 사소한 것들조차 누리지 못해서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사회에선 쉽게 찾을 수 있지 않나. 그러한 무관심을 직면했을 때 어떤 감정이 주로 드나.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표출하는 방식도 궁금하다. 작품으로 이야기하는지, 겉으로 내뱉는지.
온 : 계속 생각을 가지고 있는다. 어떻게 보면 생각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내 삶과 연결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사회도 다 바뀔 것이라 생각한다. 조그마한 생각일지라도 잊지 않고 다닌다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잊지 말자, 생각하자. 이 마인드를 지닌다.
이 : 당신의 시각은 특이하면서도 특별하다. 그래서 공유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나 역시도 당신의 작가 노트를 보지 않았더라면 ‘면도기 칼날’ 구멍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온유 작가의 작품이 존재에 대해 환기를 시켜줄 수 있는 작품이라 확신한다. 잊지 않는 것으로 표출한다 하지만 온유 작가의 작품을 보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니까. 이렇게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 게 아닐까.
온 : 내가 그러한 생각을 잊지 않고 계속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결과물이 나오는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러한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고 단순히 작업만 한다면 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잊지 않았기 때문에 정제되지 않는 것들이 나오는 것이다.
이 : 대화를 나누며 정리가 된다. 다른 작가가 똑같은 조형적 언어를 선택한다고 해도 똑같은 작업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나부터가 당신의 작품을 본 후 영향을 받고 관심 없던 주제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됐으니까. 당신이 말하는 서서히 세상이 바뀐다는 것이 이런 것 같다.
장온유 작가.
사전 인터뷰 질문
Q3. 5년 동안 ‘내 작업은 이런 흐름을 따라왔구나’ 하고 스스로 정리해 본다면,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을까요?
A3. 뚜렷한 개념이나 언어보다는, 감정의 결을 따라 작업이 자연스럽게 흘러온 것 같다. 지나간 것, 사라진 것, 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머물거나 바라보는 방식이 조금씩 바뀌어 왔고 어떤 장면은 오래 잊히지 않았으며, 그게 때로는 이미지로서, 소리로, 물성으로 남았다.
이 : 오래 잊히지 않은 장면이 있나. 당신의 답변을 읽고 ‘오래 잊히지 않는다’는 말을 충격과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근데 그 충격이 쇼크는 아니고, 감정의 동요가 크게 피었음을 의미한달까. 일상에서 흔하게 갖는 관심과는 좀 다른 게, 오래 잊히지 않으려면 장면 자체에서의 충격이 있어야 하니까. 이런 충격이 일상에서 자주 있는 편인가?
온 : 나에게는 일상에서 영향이 진짜 크게 다가온다. 그래서 유튜브를 잘 안 보기도 하고. 유튜브는 내게 있어 썸네일도 그렇고 원하지 않는 정보도 계속 밑에 뜨기 때문에 시각적으로든 뭐든 가해지는 게 너무 크다. 나는 내가 검색한 것만 보고 영향을 받고 싶은데. 인터넷에서는 원하지 않는 정보가 들어오는 순간 영향이 생겨서.
이 : 숏폼 같은 거 진짜 안 좋아하겠다.
온 : 나는 경계가 많은 사람이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지나가다가 무언가 보면 그것에 대한 영향이 엄청 커서. 그래서 작업으로든 나의 삶으로든 영향이 가해질 걸 아니까 방어하고 싶은 게 있다.
이 : 얘기를 들으며 소위 ‘어그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데. 결국 어그로를 끄는 이유는 관심을 받기 위해서란 말이지. 근데 관심을 받는 것 자체를 못 하게 되는 애들이 있으니까. 그런 애들은 완전히 무관심에 놓이게 될 것이다. 결국은 정제되고 시끄럽고 반짝거리는 애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질 텐데. 이런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느낌이다.
이 : 그렇다면 이런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사람은 모두 보는 시각이 다르니까. 온유 작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배제와 무관심’에 대한 부정적 입장이 눈에 띄는데, 누군가에게는 관심이 오히려 기회를 차단하는 막이 되어버릴 수 있다. 과도한 관심이 가해지는 경우도 그렇고. 배제와 무관심이 마냥 나쁘다고 볼 수 있나? 관심을 두지 않는 게 꼭 혐오로 이어지는 건 아닌데.
온 : 무관심은 괜찮다. 어중간한 상태가 최악인 거다. 내가 말하는 ‘어중간한 상태’는 관심도 아니고 무관심도 아닌 그런 상태다. 내가 생각하는 무관심은 아예 그냥 ‘모른다’는 것이다. 정보를 들은 적이 없다는 것.
이 : 글쎄, 나에게 있어 무관심은 정보의 부재보단 관심의 부재로 판단되는데. 예를 들어 시위가 열려서 도로를 통제할 경우, 일부는 시위의 이유보다는 도로 통제가 주는 불편함에만 주목하니까.
온 : 그것도 무관심으로 볼 수는 없다. 부정적인 관심이 있으니까. 애초에 무관심 자체는 그냥 상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 부정적인 태도가 나온다는 것, 차가운 눈빛이 간다는 것 자체가 관심인 것이다. 무관심은 눈길, 생각, 그 어떠한 것도 나에게 영향을 끼치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 그러면 당신이 말하는 관심의 척도는 영향의 유무와 연관 지을 수 있겠다. 예를 들어 혐오와 관련된 뉴스를 알고리즘이 자꾸 사회에 던진다고 치자. 대개의 사람은 관심 없다고 하지만 결국 사회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콘텐츠가 자꾸만 공유되고 이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면. 어쩔 수 없이 전반적으로 혐오에 관심이 있는 사회로 물들 수밖에 없는 걸까?
온 : 아까도 말했지만, 미디어 속에서는 원치 않는 정보가 들어오기 때문에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보이고 들리기 때문에 끊어냈다고, 안 흡수했다고 생각해도 영향을 안 끼칠 수가 없다. 정보가 들어온 순간 학습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태도에서도 그게 묻어날 수 있는 것이고.
<잼은 식으면 단단해진다> 작업 노트, 2025
이 : 마지막으로, 사실 나는 ‘날카로운 칼날을 안전하게 정리하는 방법’이랑 ‘매미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 비슷한 맥락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잼은 식으면 단단해진다’ 같은 경우는 백 퍼센트 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다.
온 : ‘잼은 식으면 단단해진다’는 사랑 이야기가 맞다.
이 : 하지만 작가 노트를 들여다보면 잼이 단단해졌다는 이유로 초반에는 계속해서 잼을 버리지만 끝내 단단한 잼마저도 사랑하게 되었지 않나. 단단한 잼을 계속 바라본다는 흐름이 다른 두 개의 작품과 궤를 같이하는 것 같다. 그 일관된 흐름을 보고 있으면 아까 전 당신이 말한 것처럼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영향이 미친다는 걸 읽을 수 있다. 정제되지 않은 당신만의 메시지라고 해야 하나.
온 : 우연이지만 듣고 보니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다.
장온유 작가의 작업실에서 나올 땐 오후 내내 세차게 내리던 비가 어느덧 그친 뒤였다. 새삼 그녀와 참 오래 대화를 나눴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나를 감화시킬 의도가 결코 없었겠으나 나는 잠시나마 곁을 지켰던 이들과 사물에 대하여 홀로 곱씹는다. 개중에는 잊히길 바라는 것들도 있을 것이고, 잊지 말아달라 아우성치는 것들도 있겠으나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시금 복기하고자 했음에도 담길 수 없었던 것들이다.
장온유 작가의 작품은 그녀가 나에게 보였던 태도처럼 관객들을 감화시킬 의도가 없다. 설득도, 회유도 아닌 그저 그녀가 지나쳐 온 삶의 궤적 속에서 받은 영향을 고스란히 내보일 뿐이다. 작업과 감각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을 공간 안에 머물 수 있게 내준다.
나는 잊혀진 것들을 한참 헤집으며 그녀의 고요를 지켜본다. 관심을 끌기 위한 정제된 것들의 반짝임을 잠시 등진 채 발산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순수를 괜스레 들춰보기도 하며. 그 과정 속에서 어쩌면 조금 부끄러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해 보았나?
장온유 작가.
* 2025. 05. 16 창원
장온유 작가와의 인터뷰
날카로운 칼날을 안전하게 정리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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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교체식 면도날이 출시되었다.
사람들은 새 면도날을 끼우고, 쓴 면도날은 벽 안의 작은 틈에 밀어넣었다.
입구는 있었지만, 다시 꺼내는 방법은 없었다.
칼날은 어두운 공간에 조용히 쌓였다.
누구도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숫자는 누구도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날카로웠던 것들.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던 것들.
아무도 건드리지 않게 된 것들.
지금,
그 안엔 아직도 무언가가 남아 있다.
매미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2025, 시아노타입에 탄닌산 토닝, 사운드, 40×60cm, 60×100cm, 110×20cm, 40×40cm. ⓒ장온유.
여느 때와 같은 여름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간헐적인 울음이 들려왔고,
열기로 뒤덮인 도시는 그 소리를 흡수하듯 가라앉아 있었다.
음은 반복되었지만,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익숙함은 매미의 소리를 앗아가고,
그렇게 소리는 점점 의미를 잃어갔다.
계절이 바뀌어도, 그 구조는 사라지지 않았다.
소리 없는 잔재처럼, 땅 아래 남아 있었다.
오키나와에서 나는 다시 그 소리를 마주했다.
일정하지 않은 간격, 공기 속에 가볍게 떠다니는 울림.
그것은 목소리였고, 흔적이었으며,
언젠가 잊힌 무엇이었다.
무엇이 사라졌는지보다는,
어떻게 사라지는지가 남았다.
잼은 식으면 단단해진다
2025, 복합매체, 가변설치. ⓒ장온유.
어느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잼을 좋아했다.
그가 좋아하는 잼의 농도는 무른 잼,
숟가락을 얹으면 천천히 흘러내리는,
빵 가장자리에서 멈칫하다가 이내 흘러버리는,
그런 잼을 좋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잼은 굳었다.
잼은 스푼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고,
그는 조용히 새 잼을 사왔다.
새 잼은 무르고, 미지근하고, 아주 달콤했다.
그는 그 잼을 하루하루 퍼먹었다.
아주 많이, 그리고 아주 자주.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이가 모두 썩었다.
잼을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처음으로 잼을 직접 만들어보기로 한다.
연구실 뒤 산에서 열매를 따고,
잘게 다지고, 설탕을 넣고, 조린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을에 달콤한 냄새가 퍼졌고,
그가 원하던 무른 잼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담을 곳이 없었다.
연구실엔 뽀얀 먼지가 덮인 실험 기구들이 있었다.
비커, 실린더, 임호프 콘.
그가 잼으로 향했을 때,
잼은 이미 굳어 있었다.
그는 잠깐 멈췄고,
그러다 울었다.
잼은 버리지는 않았다. 아니, 버릴 수 없었다.
대신 스푼을 만들었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실험 기구 하나하나에 잼을 채워나갔다.
잼은 여전히 단단했다.
그는 더 이상 그걸 바꾸려 하지 않았다.
숟가락은 조용히 그 안에 멈춰 있었고,
그는 가만히 앉아, 그걸 바라보았다.
그렇게, 단단한 잼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단단한 잼을 위한 스푼
2025, 린덴나무, 호두나무, 백자토, 글레이즈, 가변설치. ⓒ장온유.
과학자는 잼을 위해 스푼을 만들었다. 뭉툭하고 어딘가 어설픈 스푼, 작은 원형들은 그의 세 가지 감정이었다.